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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정치

다시는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표현의 자유를 위해 공연윤리심의위원회와 싸웠던 정태춘의 불법음반인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군정이 종식된 당시에, 서울시청 광장에서 집회하던 옛 풍경을 추억한다. 90년대 대중음악계가 남긴 걸작인 이 노래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다시는…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그가 기자들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노래에서 기자들을 간절히 기다려야만 했던 상황을 추억하고 있다.


 시위현장에서 사회의 소외가 무서웠기 때문일 것이다. 매스미디어가 침묵하면 시위는 고립되고 고립된 시위는 자제하지 않는 공권력에 무차별로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폭력이 아니나 무관심과 고립과 소외였을 것이다. 그러니 기자는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언론이 시위대를 비난하고 비평한다고 하더라도 취재를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나 때로는 오지 못하거나 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예 언급을 하지 않고 고사시키는 게 언론사 각각의 편집목적을 성취하는 더 강력한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평도 비난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은 언론이라면 반칙에 가까운 행위다. 모든 싸움엔 그 나름의 룰이 있으며 이런 행위는 펜의 싸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 모든 사태를 알고 나면 사회가 펜 자체를 불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과연 언론은 주요한 사실(때로는 진실)을 알고도 표현하지 않을 자유가 있을까?


 IT기반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가 대중사회 소통의 한축을 담당하게 된 오늘날은 반드시 대중매체가 뉴스를 전달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사회의 일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더 이상 사회의 신경정보가 대중매체를 타지 않고도 흐를 수 있으며 사회활동이 자율적으로 일어나기 더 쉬워짐을 뜻할 것이다. 물론 정보는 부정확할 수 있다. 그것도 심하게. 그러나 무슨 일이 있는가 하는 큰 윤곽 정도는 누구나 알게 된다.


 2011년 7월 9·10일 부산의 한진중공업으로 떠난 2차 희망버스가 옳고 그른지는 판단하지 않기로 하자.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특별한 연고가 없는 사람들 1만여 명이 모인 사건은 이상한 새소식이자 전국적 단위의 일이며 이들이 김진숙씨를 만나기 위해 봉래로타리에서 한진중공업으로 향하는 길을 정부의 공권력이 물리력으로 제압한 사건은 사회적 이야기 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 보수신문들인 조선, 중앙, 동아엔 주말동안 2차 희망버스 사건에 대해 한 줄도 쓰이지 않았으며 오늘 11일에야 조선과 동아는 외부매체를 이용해 한 건을 실었다. 정치적 입장이란 게 있으므로 이들 신문은 노사 간의 협상이 형식상 끝난 후에 김진숙씨가 버티는 상황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으며, 세상은 무슨 일이든 다 일어날 수 있으니 어쩌면 몰라서(?) 취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게다. 문제는 이 사건을 조중동 빼고는 다 알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각자의 이해에 따라 논쟁한다는데 있다.


 과거라면 신문같은 매스미디어가 사회의 눈과 귀이므로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집단을 소외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IT기술에 접속한다면 만 사람이 사만개의 눈과 귀를 갖는다. 침묵한다면 매스미디어만 침묵할 뿐이다. 한 사람이 모두를 왕따 시킬 때 누가 누가를 왕따시킨다고 말해야 할까? 한 집단이 사회전체를 소외시킬 때 누가 누구를 소외 시킨다고 말해야 할까? 앞으로 올 시대에 소외되는 것은 침묵으로 소외시키려는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정태춘은 또 한번 노래 부를 수 있을 있으리라 “다시는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