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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Context

모택동의 때 늦은 잔치

혁명가 모택동(마오쩌둥)의 큰 공과 깊은 과 그리고 그의 언행을 일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코드는 맑스 이론이 아니라 대륙의 역사에서 등장해온 '농민출신 창업황제'의 전례다.

이는 1)그의 재능은 근대과학적 학문(맑시즘을 포함한) 이해도가 아닌 무력·권력·사상 투쟁기술에 있었다는 점과 2)마오이즘은, 급속한 산업 발전이 전제인 본래의 맑시즘에서는 있을 수 없는 前자본주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과 3)곧잘 중국 '영웅'들을 논하기 좋아했다는 점과 4)탁월한 선전선동 기술로 맑시즘 고무가 아닌 모택동 개인에 대한 우상숭배 열기를 조장했다는데서 잘 드러난다.

그가 농민출신이라고 해서 그가 농민이었단 이야기는 아니다. 반대로 그는 농군의 자식이었으나 농사짓기 싫어했던 풍운아 유방과 닮았다. 농민출신성분은 그의 부모가 농사꾼이었단 이야기다. 이점은 스노우와의 인터뷰에서 농사를 돕지 않는 모택동을 타박하는 아버지에게 욕하며 농사를 점점 멀리 한 일을 고백한 것과, 대실패로 끝난 대약진 운동 당시 농사꾼이라면 누구나 알 곡물 생산량 보고의 허위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무산계급 산업노동자 혁명을 변형해서 농민에 기반한 혁명을 이끌어온 그로선 웃지못할 일이다.


마오는 모순의 인간이다. 문화대혁명기에  전통사상을 부정하고 중화문명 파괴를 주도했으나 정작 본인은 고전에 영감을 받고 인용했으며 시를 짓고 서예를 했다. 지식인 혐오를 드러냈지만 정작 본인은 지식계층으로 성장했고 노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또한 근대인이자 맑시즘 사상가면서도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조장하고 숭배를 이용해 급진적 무질서를 일으키고 마오 1人을 제외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무질서를 지배하는 황제로서 군림했다. 황제의 잔치는 바로 황제의 정치가 되었다.




역대 농군 출신 창업군주가 그랬듯이 그는 농민들에게 사랑받았고 지금도 사랑받는다. 그의 투쟁은 농민을 기반으로 삼았으며 건국 후에 지주 숙청을 통한 토지개혁으로  농민을 해방시킨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택동 권력의 원천은 인민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과 농민의 자식들인 노동자·군인들의 추앙이었다. 홍위병의 광풍은 그쳐도 대지의 인민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과연 근대 혁명가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그는 약소세력으로 시작해 내/외의 난세를 종결하고 중국을 재통일한 농민영웅으로선 한고조와, 건국 후의 거대 사업들과 권력욕에선 그가 종종 귀엽게 주장했듯 진시황과 비교 가능하다. 또한 건설적 희망이 사라진 후엔 무질서를 지배하는 폭군의 유희적 통찰력이 모황제식 다스림이었음을 잊을 순 없다.

인민을 근대로 이끈 민주 지도자와 극우 독재자 중에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은 없다. 중국은 모택동 사후에야 개인의 전제적 지배와 급진적 무질서가 끝나고 차례 차례 근대화의 일상으로 들어섰다.
 
1976, 때 늦은 잔치는 그렇게 끝났다.


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큰바람 몰아침이여, 구름 날아오르도다.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노라.
어찌하면 매서운 용사를 얻어 사방을 지켜내리.

-대풍가, 한고조 유방 作-









PS-등소평 집권 후 공개적인 모택동 숭배는 사라졌지만, 농촌지역에서 관우와 마찬가지로 모택동의 사진이나 조각을 사당에 모셔놓고 신 중 하나로서 숭배하는 일도 종종 보도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중 문화대혁명의 영향란==============================

문화대혁명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중국인민들 대부분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많은 경제활동이 "혁명" 활동이 우선이라는 논리 앞에 정지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많은 홍위병들이 베이징으로 몰려왔다 그런데 이 비용은 모두 정부가 부담했고, 홍위병의 우선적 수송은 철도망을 마비시켰다. 홍위병은 여러 역사적 건물, 공예품, 미술품, 서적을 파괴하거나 불태웠다. 한편 마오쩌둥 어록은 전인민의 "성경"이 되어 누구나 휴대하여야만 했으며 1967년 12월까지 3억 5천만부가 인쇄되었다.

[교육의 파괴]  
10년 동안 계속된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교육이 마비되었다. 이 당시에 대입시험은 취소되었으며, 사인방이 몰락하고도 한참 지난 1979년이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농촌의 노동교화소로 가야만 했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바로 중국을 떠나 망명하였다. 문혁기간동안 도시의 젊은이들은 농촌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되었고, 그곳에서 모든 정규 교육을 포기한채 공산당의 선전교육만을 받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진학이나 더 이상의 교육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의 학력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교육수준에 머물렀다.

많은 생존자들이나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사람보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능력이나 기술이 있는 사람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덩샤오핑 지지자나 서방측 목격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부적절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세대를 산출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지역별로 다양하게 나타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문맹율은 측정되지 않았다. 전장 구의 몇 개 현에서는 문혁이후 20년이 지난 이후에도 문맹율이 41%나 되었다. 중국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어떠한 문맹문제도 부인해왔다. 이 결과는 자격있는 교사들이 문혁기간동안 제거되어 빚어진 결과이다. 많은 지구에서는 교사가 없어서 선발된 몇몇 학생들이 다음세대를 교육하는 것을 책임졌다.

[전통 도덕의 붕괴]  
“ 부모는 나를 사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오 주석만큼은 아니다. ”
—"비림비공" 운동 당시, 슬로건 중의 하나

마오쩌둥의 사상은 전통 도덕과 관습을 제치고 중국에서 모든 것들을 이끄는 중심논리가 되었다. 홍위병의 권한은 군, 공안, 그리고 사법기관을 넘어섰다. 중국의 전통 예술과 사상은 무시되었고, 그 자리에 마오쩌둥 사상이 차지하게 되었다.

홍위병에 가담한 청소년이 자신의 부모나 스승을 반혁명세력이라고 고발하거나 또는 구타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문혁 지도부는 사람들이 문화적 전통들을 비판하고,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것은 "비림비공" 운동때 더욱 강조되었다.

[당파적 전쟁]  
문혁은 또한 공산당 내에서 여러 당파의 내부 권력투쟁을 야기하였다. 이중 많은 것들은 당지도자의 권력투쟁과는 상관없이 지역 당파주의와 사소한 경쟁심이 "혁명"에 관계없이 빚어낸 것이다. 정치적 혼란 때문에, 지방 정부는 존재하더라도 집행력과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당파에 속한 이들은 백주의 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며, 농촌지역에서는 정치적 암살이 흔히 일어났다.

대중은 자발적으로 이러한 당파에 가담했고, 다른 당파에 대한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런 당파 투쟁을 야기한 사상적 차이는 사실 모호하거나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지역적 권한을 장악하는 것이 대중이 참여한 당파투쟁의 유일한 동기였다.


[문화유적과 전통유산의 파괴]  
문혁 기간 동안 건물, 공예, 서적등의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구시대적 산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다. 공예품들은 각 가정에서 탈취되거나 혹은 즉석에서 파괴되었다. 얼마나 많이 파괴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산출하기 어렵다. 서양의 목격자들은 중국의 수천년의 역사 유물이 단 10년간의 문혁기간동안 파괴되었다고 추산한다. 또한 이런 파괴는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 역사가들은 문화대혁명을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비유하기도 한다.

종교에 대한 박해도 이 기간동안 심화되었다. 종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문혁 기간 동안 중국의 전통 문화의 지위도 크게 손상되었다. 많은 전통문화, 예를 들어 점술, 종이 공예, 풍수지리, 중국 전통의례, 음력, 중국고전학(한문), 그리고 음력 원단(1월 1일) 등의 위상이 중국에서 약화되었다. 이 중 어떤 것들은 홍콩이나 타이완과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후에 대륙에서 복원되기도 하였다.



[소수민족 문화의 박해]
문혁은 특히 소수민족의 전통문화에 파괴적이었다. 티벳에서는 티벳인 홍위병도 참여하여 6,000개의 수도원이 파괴되었다. 내몽고에서는 수 십년전 해체된 "내몽고 인민당"의 분리주의자로 지목된 79만명의 인물이 박해받았다. 그중 22,900명은 구타로 사망하고, 120,00명은 불구가 되었다.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위구르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코란이 불살라지고, 무슬림 이맘이 물감을 뒤집어 쓴 채 조리돌림 되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조선어로 수업하는 민족학교들이 파괴되었고 족보는(홍위병의 강요도 있었지만, 반혁명세력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 하여 자발적으로) 불살라졌으며, 민족주의자로 지목된 인사들은 구타 및 학대를 당했다. 윈난 성 에서는 다이 족의 왕의 궁전이 불살라졌다. 또한 1975년 샤덴 사건에서는 인민해방군이 회족 무슬림들을 학살하였는데 희생자 수는 1,6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박해와 잔혹 행위]
문혁 기간 동안 수백만명의 중국인들은 인권을 유린당했다. 제국주의의 "첩자", "주구(走狗)", "수정주의자"로 몰린 인사는 폭행, 감금, 강간, 고문등을 당하는 것이 예사였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수십만명 또는 그 이상의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굶어 죽거나 또는 중노동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수백만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어떤 사람은 고문과 구타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덩샤오핑의 아들인 덩푸팡은 홍위병의 구타 때문에 4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목숨을 건졌으나, 불구가 되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였다.

광시 성의 어떤 지역에서는 이런 폭력이 극단적으로 변하여 "계급투쟁"과 "정치혁명"의 이름으로 식인행위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당의 고위 역사가들조차도 문혁 기간동안 어떤 곳에서는 "반혁명세력"을 때려 죽인 후 간과 살점을 뜯어먹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피해자 수의 추정치]
문혁 기간 동안 벌어진 사상자의 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1966년~1969년의 문화대혁명의 혼란이 극도에 달했을 시기에, 50만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인방의 재판에서 중국의 법원은 문혁기간중 729,511명이 박해를 받았고, 이 중 34,80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죽음이 보고 되지 않았고, 경찰이나 지방 당국이 숨겼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또한 중국 당국은 이를 위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왔다.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농촌에서만 360만명이 박해받았고, 그중 750,00명에서 150만명이 사망하고, 비슷한 숫자가 부상당했다고 추정된다. 영국에서 활약하는 중국 작가 장룽(중국어 정체: 張戎, 병음: Zhāngróng, 영어식 표기로는 Jung Chang) 쓴 마오의 전기(In Mao: The Unknown Story) 에서는 문혁기간중 300만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주요 희생자]

라오서 : 유명 작가, 박해를 받고 자살.
슝스리 : 철학자, 베이징 대학 교수, 박해를 받고 절식하여 자살.
리리싼 : 정치가, 1920년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비판의 대상이 되자 음독 자살.
톈한 :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 박해를 받고 병사.
허룽 : 군인, 원수. 홍위병에 의한 감금 및 폭행 중 병사.
주덕해 : 조선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초대 주장(州長). 문혁기간중 박해당해 병사. [33]
이 외에도 각계에서 많은 명사가 홍위병의 학대와 구타에 의해 사망하거나, 그로 인한 병사, 혹은 이를 견디다 못한 자살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