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재능이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에, 타고나고 훈련에 의해 키워질 수 없는 재능의 한계를 극복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조차 한 분야나 영역에서 최고의 자리에 위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때면 신의 섭리란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나 싶다.
재능이란, 신이라 불러도 좋고 세상 그 자체라 불러도 좋은 환경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전성기가 몇주기나 지났음에도 종종 나타나 우승을 거머쥐는 이윤열 저력의 원동력인 한순간의 판단으로 빌드와 운영의 우위를 뒤집는 신의 한수나, 복잡한 전황과 불리한 맵을 몇수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으로 돌파해내며 저그의 구세주로 등극한 마재윤의 직관적인 정보파악 능력같은 것들을 평범한 사람들이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가라 묻는다면 난 회의적으로 답할것이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그러나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도 훈련에 의해 강해질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인간의 노력은 때로 이능(異能)을 제압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스타에서 훈련의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은 컨트롤 스킬과 반응속도 그리고 정형화 빌드와 운영에 대한 공부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컨트롤 스킬과 반응속도는 신체나 노쇠의 문제가 있기 전까지는 꾸준한 반복연습이 있다면 유지가 가능한 부분이다. 반대로 정형화 빌드는 약간의 머리와 노력이 필요하고 운영은 다양한 경험과 생각하는 습관을 통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성장한다.
[빌드란 가장 단순화된 운영이다. 그래서 빌드들은 보통 경우의 수가 적은 초반에만 딱딱 정립된 패턴들이 있고 같은 이유로
양산형 테란의 FD->4팩->투아모리->풀업 200 채워 ㄱㄱ나 3햇->뮤짤->저럴뮤타 밀어치기 등등은 운영이 아닌 빌드라 힐 수 있다.]
07년도 테란의 수장자리를 위태롭게 지키고 있는 진영수는 아마도 이런 재능과 노력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이머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진영수는 소울의 어느 듣보잡 게이머였고 저그전 승률이 좋다는것 외엔 눈에 띄는게 없는 선수였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어느 테란이던 저그전 승률은 다 높았기 때문에(보통 60%대) 그 조차도 특별한 메리트는 되지 못했다. 심하게 말해서 신인 시절의 경기를 보면 그 선수가 어느 정도 올라갈 수 있는지 대략은 가늠할 수 있고 자신의 재능에 과도하게 취해 그릇을 깨지못한 몇몇을 빼면 그 예상은 대부분 들어맞는다 할 수 있는데 진영수는 딱, 저그전 타이밍 러쉬에 능한 평범한 테란 선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그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마재윤이 슈파와 MSL에서 저그잡는 테란의 상징인 최연성,임요환,이윤열,을 꺽고 MSL 3회 우승과 OSL 입성으로 철권통치를 굳히기 시작할 무렵, 본좌 검증 혹은 트집잡기를 위해 신인이던 마재윤을 이긴 05 듀얼토너먼트에서의 성적 때문이었고(2:1) 때맞춰 올라간 곰티비 1차 MSL 16강에서 마재윤을 이긴적이 있고 또 이길 수 있다고 자신있게 애기한뒤 아무것도 못해보고 지게하는 굴욕을 안긴 다음에서부터야 마재윤에 대한 테란의 대안으로 제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4강에서 dog테란맵과 자신의 한계조차 극복하며 본좌가 된 마재윤에게 무너지긴 했지만.
그러나 이때에도 난 그를 강력한 저그킬러 이상으론 인정하진 않았다. 테란은 자신이 게임을 끝낼 수 있는 타이밍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종족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유로 양산형과 수비형테란이 성립된다. 같은 노력으로 정형화 빌드와 컨트롤 그리고 생산력을 갈고 닦는다고 할때 쉽고도 빠르게 강력해질 수 있는 종족은 테란이며 진영수는 독특하게도 일반적인 양산형 테란의 길을 따르고 있진 않지만, 그 역시 컨트롤 스킬과 생산력 그리고 반응속도를 극한으로 단련한 유저다. 비슷한 성향의 토스 박영민이 운영능력의 한계를 보이며 몰락할 때도 진영수만이 건재한것은 난 그런 이유때문이라고 치부했다. 마찬가지로 TvsP에서 보여진 진영수의 약세는 그가 최연성이 정립한 양산형 테란의 시나리오를 따르지 않기 때문라고 못 박으면서.
임요환-이윤열 이후로 가장 뛰어났던 타이밍 테란은 아마 'Silent Timing' 나도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래 뛰어난 랜덤 유저라는 경력을 바탕으로 3종족 초중후반 찰나의 틈에 리스크를 감수한 빌드를 맞추고 병력을 운용하는 재능은 가히 신기였다. 정확하다기 보다는 미스테리 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의 타이밍에 기반한 물량진격은 직접 보고도 이해가 어려웠다. 그의 재능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던 시기는 한게임배, 군문제로 게임을 포기하고 한동안 놀고나서 마음을 고쳐먹고 리그에 도전하던 당시였는데 연습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타이밍러쉬 중에서 가장 연습량이 적게 드는 초반 벙커링으로 예선에서 8강까지 올라섰다. 예고 벙커링, 저그,토스 벙커링을 모두 성공시켰던던 당시의 모습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고, 야바위 틱하다며 비난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뒤 어느정도 실력이 회복돼, 박태민이 경기를 지배했던 8강 대결에서 벙커링 실패후 질질 끌려다니다 날선 감각의 후반 타이밍러쉬 한번으로 게임을 끝내며 비난을 잠재웠고 이어진 질레트배에선 8강에서 박용욱을 기묘한 흑마술사의 포스로 잡고 4강에서 마인대박의 박정석과 2:3 명승부를 만드는것을 보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경기를 보는 눈이 없는지 그의 타이밍을 보면서 절감하곤 해야 했다. 처세 불량과 고질적인 연습 부족으로 비난과 함께 하향세에 접어들기엔 재능이 아까운 풍운아가 아니었나 싶다. (재밌는 것은 나도현 역시 초창기의 마재윤에게 05 WCG 예선과 I-TV 랭킹전에서 4:0의 성적을 올렸다는 사실 신인때 테란전에서 괴력의 물량과 힘을 보여줬던 마재윤이지만 아직 타이밍 러쉬에는 취약했다는걸 짐작할 수 있다.)
TvsP에서 토스를 압도하는 타이밍테란이란건 최소한 나도현 급의 감각이 없으면 어렵다. FD와 양산형 수비테란이 등장하기 전까지 테플전은 종종 타이밍러쉬와 그것을 막아내는 토스와의 승부였고 결과적으로 정형화된 타이밍 러쉬를 토스가 모조리 막아낼 수 있게 되면서 토스의 우위가 굳혀졌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서-최로 이어진 테플전에서 롱런하는 저력있는 테란들은 모두 중후반 운영과 힘싸움에도 능했던 선수들이었다.
또 하나의 유명한 타이밍 테란인 한동욱을 살펴보자. 다른 이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난 한동욱의 타이밍 감각자체는 꽤 떨어지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만들어내는 타이밍이란 사실 말도 글도 안되는 화려한 컨트롤 테크닉으로 틈을 찢어 발기며 만드는 방식이고 운영력이 상당히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정형화되고 딱딱하며 예측할 수 있는 범위내에 타이밍러쉬를 감행한다. 인상적인 플테전 약세는 생각해보면 별것 아니다. 뻔히 읽히는 억지타이밍에 컨트롤만 믿고서 들이대는 테란에게 소수 컨트롤 싸움과 체제의 상성우위를 보이는 토스가 몇번이고 당해줄리 없지 않은가. 거기에 더해 타이밍 러쉬 이후의 병력충원과 후반 운영이 나쁜 테란은 승률이 갈수록 떨어지는게 자연스런 일이다. 승기를 잡고도 놓친 경기들을 좀더 줄일 수 있었다면 그의 토스전은 지금보단 한단계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진영수.
이 선수가 만들어내는 타이밍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에 바탕을 두고 있다. vsZ 에선 방어에 최소한의 투자를 하고 스캔도 늦게달면서 컨트롤과 반응속도에 의지한채 치명상을 빗겨나가며 저그의 제2멀티를 철저한 단속을 통해 저지하고 저그의 도발과 속임수에 반응하지 않는 절제력을 바탕으로 최대한 앞당긴 빠른 타이밍에 간결한 컨트롤 세네 수와 물량충원으로 승부를 가른다. 拔刀一劍 天下第一. vsP도 그닥 다르지 않다. 중장갑을 버림으로서 얻는 속도, 철저한 사전작업. 간결한 콘트롤과 물량의 지속적 충원. 진영수를 보노라면 검하나에 의지한채 수천수만번의 찌르기와 베기 그리고 보폭 재기로 단련된 강인한 무사의 이미지가 떠오른다.저그전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저그에겐 상성의 우위를 바탕으로 실수만 안한다면 타이밍을 무조건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토스전은? 충분한 기본기가 있고 좋은 타이밍이 있기에 40% 대의 승률에서 공격적인 타이밍 테란으로선 나름 괜찮은 경기력을 보여줄 정도로 발전헀다. 그러나 결국은 거기까지, 그것만으론 토스와 싸울 충분조건은 되도 정상급의 토스를 이길 필요조건은 되지 않는다. 보험테란의 치욕과 스카웃 관광의 굴욕을 바탕으로 와신상담 해가며 준비한 MSL 8강에서 김택용에게 선전했음에도 2:3으로 분패. 그만큼 했으면 이제 쉽게 지지않고 안정적인 승률을 보장받을 수 있는 양산형 테란으로 선회할만도 했고 나 역시 한계가 있는 스타일과 재능으로 보여줄만큼 보여줬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가 그후 테플전을 극복한 방식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비시즌에 치뤄진 WCG 국내 예선에서 강민(2:0),박영민(2:0),마재윤(2:1),송병구(2:1)를 격파하며 우승. 그 사이에(마재윤전 후) 바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경남 STX 팀리그에서 박지호,김택용,고석현을 연파하며 팀을 우승으로 견인. 이 강렬한 승리들의 비결은 그가 리스크를 한번 더 감수한데에 있다.
진영수는 변형태처럼 투팩에만 의지하거나 SCV를 극단적으로 줄여가며 타이밍을 만드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더블과 어느정도 꾸준한 SCV생산을 통해 병력충원의 힘을 키우고 대신 속도는 장갑과 방어를 줄임으로서 얻어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한발짝 더나가 때론 앞마당에 대놓고 커맨드 센터, 엔베-터렛 생략, 아카데미-스캔 생략 후 팩을 올리고 먼저 물량을 모으며 본진에 난입한 게릴라 병력의 피해를 쌩까기도 하고 속도를 위해 퉁퉁포로 밀어붙이다가 병력이 크게 줄어도 개의치 않고 상대 앞마당까지 달려들어 다수 SCV와 함께 토스의 발뒷꿈치에 이빨을 악물고 늘어진다.
난 그때 진심으로 한 게이머의 노력과 의지에 감탄하고 존경을 표했다.
"트리플넥을 가면서 리버로 시간을 끌거나 앞마당 먹고 캐리어 타는 짓을 접고 토스가 정면에서 붙는다면
승리를 장담할 순 없겠지만 멀티단속이 철저한 진영수에게 딱히 불리한 싸움 구도는 나오지 않겠구나..."
진영수의 무난한 테플전 후반운영은 볼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아직도 물음표임엔 변함이 없다. 초반의 극단적인 선택은 찌르기에 위험할 수도 있고 그런식으로 김택용에게 많이 패했다. 그러나 플토가 진영수에게 그런 수를 쓰기엔 이젠 너무나 큰 담력을 요구한다. 적당한 정도에서 멈추거나 실패한다면 진영수 필사의 의지가 담긴 일격을 막을 방도가 없으니까. 후반운영을 보강하며 나아간것이 아니기에 이 상승세는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리그에서 정상급의 토스들에게 이길 수 있는 승부가 가능한 테란은 진영수뿐이라 해도 좋다.
무도의 역사에서 종종 화자되는 말 중에 지지않는 검과 이기는 검이란 말이 있다. 발검에서 한발을 더 내딛는건 간격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동시에 상대의 간격에 그대로 허점을 노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합의 승부를 결정짓는건 바로 그 이기기 위해 내딛는 과감한 한발자국이다.
테란은 인간의 종족답게 정해진 빌드와 생컨의 연습을 통해서 가장 쉽게 성장할 수 있는 종족인탓에 효율적인 양산형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그중에서 진실로 '사람'답다고 할 수 있는 테란의 보물들이 07년 즈음에 이렇게도 드문것은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잊어먹고 있기 때문이리라. '영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인간의 영혼이란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는 끈기와 생각하는 자세라고 본다. 진영수에게는 그게 있었고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테란의 재능들을 제치고 군계일학처럼 우뚝 높이솟은 그가 있다.
천일의 연습을 단(鍛)이라 하고 만일의 연습을 련(鍊)이라 한다.
그것은 비단 육체의 단련만이 아닌 이기고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과 의지의 단련을 포함하는 말이다.
기상천외한 이능(異能)의 재주를 지닌 천재들을 제압하고 상상이상으로 현실적인 강함을 지니게 된 최정상급 저그와 토스를 날카롭게 겨냥하는것이 그저 평범한 인간 그 자체인 테란 진영수의 극한으로 단련된 검날이라는건 나의 희망이고 또한 범재의 의지이기도 하다.
진영수의 경기를 볼때면 우리는 종종 그의 머릿글자를 딴 치어풀을 중계를 통해 볼 수 있다.
"진실된 영혼의 수려함' 난 이 문구 이상으로 그를 잘 표현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글의 완성엔 Felix님의 주옥같은 글에서 많은 도움이 있었음을 알려드립니다.
PS- 테테전은 관심이 없기도 하거니와 문외한이라 언급조차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건 진영수의 테테전이 공격적이라는것 정도고 그에 대해선 다른 분들께서 보충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